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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넹', '넵' 사이...
의욕충만인가, 립서비스인가 (조선일보)
[일러스트 : 안병현 '조선일보']
직장인들 사이에 이른바 '넵병(病)'이 창궐하고 있다. 문자나 메신저에서 상사의 지시나 부름에 '넵'이라고 답하는 일을 빗대어 이르는 현상. '아무튼, 주말'은 이 전염병(?)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SM C&C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설문조사를 의뢰했다. 20~50대 직장인 3266명이 응답했다.
직장 상사가 문자나 메신저로 뭔가 지시했을 때 '알겠다'를 어떻게 회신하는지부터 물었다. '네'가 60%였고 '넵'(34%) '넹'(5%) 순으로 조사됐다. 연령대에 따라 격차가 컸다. 20대에선 '넵'이라는 응답이 '네'와 같이 46%를 차지했다. 반면 상사일 가능성이 높은 40대와 50대에서 '넵'은 각각 28%에 그쳤다. 또 전체의 53%는 '넵'을 쓰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고 답했다. 쓴 적도 받은 적도 없다는 응답자는 11%에 불과했다.
'넵'은 중독성이 있을까. 표본의 절반이 '넵'이나 '넵넵' 따위로 답하는 빈도가 늘고 있다고 답했다. '매우 그렇다'가 13%, '그런 편이다'가 37%였다. 연공서열 하단에 자리 잡은 20대에서는 '매우 그렇다'가 21.4%, '그런 편이다'가 41.2%로 치솟았다. 합치면 약 63%. 넵병이 20대 직장인 100명 중 63명에게 발병한 셈이고 병세가 점점 깊어진다는 뜻이다.
전염병 원인과 특징을 밝히는 일을 역학조사라고 한다. 넵병은 심리적인 맥락을 살펴야 한다. 이번 조사 결과 직장인은 '더 의욕적으로 보이려고' 또 '더 공손해 보이려고' 넵을 사용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더 의욕적으로 보이려고 '네' 대신에 '넵'을 쓰는지 묻자 '그런 편이다'가 37%, '매우 그렇다'가 10%로 나타났다. 더 공손해 보이려고 '네' 대신에 '넵'을 쓴다는 응답은 '그런 편이다' 33%, '매우 그렇다' 9%였다. '나는 당신의 을로서 자발적이고 예의 바르다'는 신호를 보내고 싶어하는 강박은 20~30대에서 두드러졌다.
넵은 봉급생활자라는 자의식이 드러나는 말투라 '급여체'로도 불린다. 써야 할 때와 쓰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황혜진 천랩 이사는 "직장 후배가 '넵'이라고 답하면 내가 하는 일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내 경우는 사내에선 '넵'을 사용하지 않고 밖에서 을이 돼 뭔가 요청하는 상황일 때만 가끔 쓴다"고 했다.
국립국어원도 넵병을 알고 있다. 오픈사전 '우리말 샘'은 "요즘 직장인들은 딱딱해 보이거나 가벼워 보일 수 있는 '네' '넹' 따위의 대답 대신에 빠르고 명료한 느낌을 주는 '넵'을 많이 사용한다"고 넵병을 정의한다. '넵넵'은 바쁠 텐데 넵을 두 번이나 쳤다는 점에서, '넵넵!'은 자판까지 바꾸는 번거로움을 감수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기도 한다.
그냥 '네'라고 하면 어딘지 딱딱하고 냉정한 느낌이 든다. 설문조사에서는 직장 상사에게 '넵' 대신에 '네'를 쓰고 불안한 적이 있는지도 물었다. '그렇다'가 26%로 집계됐지만 20대만 보면 32%로 증가했다. 한글날이 코앞인데 신경 안정제 대신 'ㅂ' 받침 하나로 불안이 진정된다면 세종대왕에게 감사할 일 아닌가?
스테디셀러 '회사의 언어'를 쓴 김남인씨는 "회사 후배들에게 뭘 이야기하면 '알겠다'의 80% 이상이 '넵'으로 돌아온다"며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직장인이 피해야 할 회신도 있다"며 '네' '네.' '네..' 등 세 가지를 꼽았다.
넵 옆에 느낌표나 이모티콘이 있는지 여부가 소통에 큰 차이를 만들까.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그렇다'는 응답이 76%에 달했다. 이를테면 '넵!'에서 느낌표는 '충성'이나 '필승' 같은 경례 구호를 붙인 느낌을 준다. 김한샘 연세대 언어정보연구원 교수는 "온라인 대화에서는 손짓, 표정 같은 비언어적 행위로 감정을 전달할 수 없다"며 "직장인들은 그 결핍을 문장부호나 이모티콘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감정은 복잡하고 미묘하며 위장에 능하다. 넵병은 혹시 일종의 감정 노동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직장인들의 생각은 '매우 그렇다'가 11%, '그런 편이다'가 43%였다. 합치면 54%. 연령별로는 20대의 60%, 30대는 57%가 '감정노동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회사라는 정글에서 살아남으려고 상황별 넵 사용법을 갈고닦는 식이다.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업무에서 상대 연령에 따라 어떻게 답할지 고민하는지도 물었다. '그렇다'가 70%였는데 연령이 올라갈수록 그 비율이 줄어들었다. 김한샘 교수는 "직장에서 서열이 올라갈수록 상대를 덜 배려한다는 뜻이라 흥미롭다"고 했다.
넵 좀 드셔본 분들이 '넵의 맛'을 더 잘 알 것이다.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직장 상사에게도 물었다. 문자나 메신저로 일을 지시했을 때 가장 받고 싶은 답이 뭐냐고.
역시 '넵'이 46%로 금메달을 먹었다. 은메달은 '넹'(16%), 동메달은 '넵넵!'(12%)이 가져갔다. '넵넵!!'(9%) '넷'(7%)이 뒤를 이었다. '넵넵ㅋ'이나 '넵넵ㅎ'보다는 '넵넵'을, 또 '넵넵'보다는 '넵넵!'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팀장 직급이라는 오현수(39)씨는 "일할 때는 팀원이 넵 뒤에 'ㅋ'이나 'ㅎ'을 달기보다는 느낌표(!)를 붙여야 더 의욕적으로 보인다"고 했다.
직장 상사가 '알겠다'는 의미로 후배나 부원에게 사용하는 문자는 무엇일까. '오케이'가 40%를 점령했다. 'ㅇㅋ'(25%) '굿'(12%) 'ㅇㅇ'(10%) '오키요'(8%) 순이었다. '오케이' 'ㅇㅋ' '오키요'는 뿌리가 같다. 즉 Okay는 대한민국 업무 속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영어 단어인 셈이다. 김한샘 연세대 교수는 "40~50대에서도 'ㅇㅋ'나 'ㅇㅇ' 같은 자모(字母)로 '알겠다'를 표현하는 경향이 평균을 상회한다는 점이 뜻밖이었다"며 "자모 하나로 음절 전체를 대신해 입력 시간을 절약하는 소통 방식이 사회 전체에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라고 했다.
일을 지시했는데 '네' 하는 답이 온다면 무슨 뜻일까. '일을 하겠지만 약간 불쾌감이 느껴진다'거나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강하다' 등 부정적 인상을 받는 비율은 40~50대(약 28%)보다 20~30대(약 40%)에서 높게 나타났다. 젊은 층이 무례한 넵도 잘 감별하는 것이다.
iMBC 대표를 지낸 강연가 손관승씨는 넵병에 대해 "출근할 때 옷을 갈아입으며 마음을 가다듬듯이 업무의 언어와 비(非)업무의 언어는 구분해야 한다"며 "직장에서는 의사를 명확히 전달해야 하고, 상대방이 말하지 않은 것까지 읽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현대 경영학을 창시한 피터 드러커는 소통에 대한 명언을 남겼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들었느냐가 중요하다.'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